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폰 만슈타인 (문단 편집) ==== [[성채 작전]], 그리고 공격의 좌절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ca9364ef6e0ec0f95535551f2c7cf222.jpg|width=500]] ▲ 1943년 6월경 [[쿠르스크 전투]] 직전 실시한 대규모 기동 훈련에 초대한 [[튀르키예군]] 장성과의 만찬[* [[튀르키예]]는 당시 친독 성향을 보이던 [[중립국]]이었기에 터키를 끌어들이면 고착된 동부전선의 전세를 유리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자국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인수분해되었다가 [[튀르키예 독립전쟁|전쟁]]으로 본토나마 건사한 경험 때문에 독일 편에 서는 것을 그다지 내켜하지 않았고, 독일의 패망이 확실시되던 1945년 2월 23일에야 숟가락 얹기 식으로 [[연합군]]에 참가하여 추축국에 [[선전포고]]했다.][* 튀르키예에 인접한 캅카스 방면 전선은 소련에게는 아킬레스 건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지역은 수비에 유리한 산지인데다 터키군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으니 튀르키예로서도 위험한 도박이라 할 만했다.] 에서 [[시가(담배)|시가]]를 피우는 만슈타인. [[골초]]였던 그는 격전 중에도 시가를 꼭 피웠다고 한다.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결과 쿠르스크 지역이 돌출부로 남게 되었다. 하르코프의 대승을 얻어낸 만슈타인은 소련군이 이전의 패배로 비틀거리고 있다고 보았고 이 기회에 북쪽으로 공세를 펼쳐야 하며 동시에 중부집단군이 남쪽으로 공세를 펼쳐서 쿠르스크의 돌출부를 제거하는 '성채 작전(Operation Zitadelle)'의 원형이 될 작전을 제안하며 즉시 공격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랜만에 현역에 복귀한 [[하인츠 구데리안]]은 [[알베르트 슈페어]]와 함께 '더 이상의 동부전선에서의 대규모 공세는 불가능'하다며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4월 말, 라스텐부르크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북방 공세를 담당한 9군 사령관 [[발터 모델]]은 엄청난 양의 항공 사진을 제시하며 이미 쿠르스크 지역은 소련군의 방어가 겹겹이 완성되어 있음을 증명하였고 따라서 전술적 증원이 없는 한 이 작전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작전의 제안자인 [[https://en.wikipedia.org/wiki/Kurt_Zeitzler|쿠르트 차이츨러]]에게 '성채 작전은 잃는 것만 클 뿐 성공 가능성은 없다.'고 말하였다. 히틀러는 이에 중부집단군 사령관인 [[귄터 폰 클루게|클루게]]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클루게는 총통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초기 작전일은 5월 12일이었으나 멜렌틴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미 만슈타인은 성채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고''' 히틀러마저도 흔들렸으나 차이츨러가 다시금 신형 전차가 갖추어지는 6월 이후로 공세일을 미루자 제안하였고, 히틀러는 다시금 카이텔과 차이츨러의 설득에 넘어가고 만다. 6월 중순이 왔을 때에는 중부집단군도 남부집단군도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지극히 회의적인 상태였으나, 더 이상 작전을 취소할 수 없게 되자 휘하 부대를 공세 위주로 훈련시켜 재편성한다. 이후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헤르만 호트]]가 이끄는 제4기갑군을 앞세워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으로 파고들어갔고 이로써 [[쿠르스크 전투]]가 개시되었다. 그러나 중부집단군의 공세는 소련군의 거센 반격에 둔화되었고 이를 지휘하던 명장 발터 모델은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공세를 시작한 지 5일 만에 북부에서의 공세는 한계에 달하게 된다. 반면에 남부집단군은 프로호로프카에서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으로 인하여 돌출부가 남부집단군 전력만으로 돌출부를 끊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신장되었으며 그런 와중에 [[이탈리아 왕국]]에 연합군이 상륙하게 되자 히틀러는 이탈리아 쪽으로 전력을 투입하고 [[이탈리아 전선]]이 개막했다. 비록 만슈타인은 계속 공격하기를 원했으나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독일이 승리할 가능성은 없었다. 비록 만슈타인의 독일군이 선전했다고는 하지만 제48기갑군단과 SS 2기갑군단은 이미 지속적인 전투로 인해 만신창이와 전투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반면에 스텝 예비군은 전투에 참가를 안 해서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대로 공세를 유지했다가는 군단 자체가 와해되는 결말밖에 없었다. 여담이지만 만슈타인은 자신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서 히틀러만 아니었어도 이길 수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제목인 '잃어버린 승리'가 다름 아닌 쿠르스크 전역을 이야기한 것이다. 물론 만슈타인 생전엔 소련의 2차대전 당시 기밀문서들이 해금되지 않은 상태였고 만슈타인은 자신이 꺾으려 들었던 보로네시 전선군 뒤에 스텝 전선군이라는 무지막지한 병력의 소련군이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의미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